미나모토노 요시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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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헤이안 시대 말기,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1159년 헤이지의 난으로 아버지 요시토모를 잃고, 형 요리토모의 거병에 참여하여 겐페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이치노타니 전투, 야시마 전투, 단노우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헤이시를 멸망시켰으나, 공을 독차지한다는 평가와 요리토모와의 갈등으로 가마쿠라 입성을 거부당하고, 결국 몰락하여 1189년 오슈에서 자결했다. 그의 생애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되어 일본 문학 및 대중문화에서 널리 다루어지며, 특히 '호간비키'라는 용어로 그의 인기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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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시쓰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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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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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
일본어 이름 | 源 義経 |
로마자 표기 | Minamoto no Yoshitsune |
출생 | 1159년경 |
출생지 | 헤이안쿄, 헤이안 시대 일본 |
사망 | 1189년 6월 15일 (향년 30세) |
사망 장소 | 고로모 강 전투, 히라이즈미, 가마쿠라 막부 |
가문 | 미나모토 씨 |
가문 표시 | 왕대잎과 용담꽃 |
어린 시절 이름 | 우시와카마루, 샤나오 |
별명 | 구로, 판관, 정위, 예주 (가명) |
계명 | 捐館通山源公大居士 |
묘소 | 미야기현구리하라시한간모리(전해지는 묘지), 가나가와현후지사와시시라하타 신사(전해지는 수급 무덤) |
관위 | 종5위하 좌위문위, 검비위사 소위, 이요 수 |
아버지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
어머니 | 도키와 고젠 |
양아버지 | 이치조 나가나리 |
형제 | 미나모토노 요시히라, 미나모토노 도모나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시카도, 미나모토노 마레요시,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아노 젠세이, 미나모토노 기엔, 보몬히메, 로노 온카타, 이치조 요시나리 |
정실 | 가와고에 시게요리의 딸 (고우고젠) |
첩 | 시즈카 고젠, 다이라노 도키타다의 딸 (와라비히메) |
자녀 | 남자아이, 여자아이, 지토세마루, 여자아이(미나모토노 아리쓰나의 아내?) |
군사 경력 | |
소속 | 미나모토 씨 |
주요 전투 | 우지 전투 (1184년) 아와즈 전투 (1184년) 이치노타니 전투 (1184년) 야시마 전투 (1185년) 단노우라 전투 (1185년) 고로모 강 전투 (1189년)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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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난 요시쓰네의 어릴 적 이름은 우시와카마루였다. 헤이지의 난에서 아버지가 패하고 죽은 뒤, 어머니 도키와 고젠과 함께 야마토국의 산에 숨었다. 어머니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붙잡히자, 형제들과 함께 기요모리에게 출두하여 출가를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도키와 고젠은 기요모리의 첩이 되었다가 이치조 나가나리와 혼인하였다.
11살 때 구라마데라에 맡겨진 우시와카마루는 샤나오라 불렸다. 이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찾아 오슈로 갔다. 원복을 올린 장소는 여러 설이 있는데, 《기케이키》에는 아버지 요시토모가 최후를 맞은 오와리국에서 원복을 올렸다고 하며, 이름은 '요시쓰네(義經)'로 지었다고 한다.
지쇼 4년(1180년), 이복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국에서 거병하자, 요시쓰네는 히데히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슈를 떠나 요리토모에게 합류했다. 후지가와 전투에서 승리한 요리토모는 기세 강에 진을 쳤고, 이곳에서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와 처음 만났다. 이후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와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에게 군권을 맡겨 헤이케 토벌을 맡기고 자신은 동쪽을 다스리는 데 전념했다.
1180년, 요시쓰네는 겐페이 전쟁에서 요리토모에게 합류했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헤이시를 몰아내고 입경했으나,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를 낮게 평가하고 요리토모에게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내렸다.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와 나카하라 친요를 교토로 보냈으나, 군세가 적어 입경은 어려웠다. 호주사 전투가 발발하고,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했다. 요시쓰네는 이세 국인 등과 연계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1184년, 노리요리가 관동에서 원군을 이끌고 요시쓰네와 합류, 우지가와 전투에서 요시히로 군세를 무찌르고 입경, 요시나카는 아와즈 전투에서 토벌당했다.
요시쓰네는 노리요리와 함께 여러 전투에서 다이라 씨를 물리쳤다. 1184년 초 요리토모의 명령에 따라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아와즈 전투에서 죽였다. 이후 헤이시는 사이카이에서 세력을 회복, 후쿠하라쿄까지 진출했다. 요시쓰네는 노리요리와 함께 헤이시 토벌을 명령받고, 미쿠사야마 전투에서 야습으로 다이라노 스케모리 등을 격파했다.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요시쓰네는 정예 70기를 이끌고 절벽에서 역낙하를 시도하여 헤이시 본진을 기습, 가마쿠라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1184년 3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1185년 3월에는 야시마 전투에서 다이라 씨를 물리쳤다. 그리고 한 달 후 다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씨를 멸망시켰다.[3] 아와즈 전투 이후 요시쓰네는 오미 국 통치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치노타니 전투 후, 노리요리는 가마쿠라로 돌아가고, 요시쓰네는 교토에 남아 치안 유지, 기나이 근국의 지방 무사 조직화 등 지방 군정을 실시하고, 사찰 소령 관계 재판 등 민정에도 관여했다. 1184년 6월, 요리토모의 추천으로 노리요리 등 源氏 3명이 국사에 임명되었지만, 요시쓰네는 제외되었다. 1184년 8월 6일, 삼일 헤이시의 난이 발발하여 요시쓰네의 사이카이 출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이카이로의 출진은 노리요리가 맡게 된다. 8월, 노리요리는 산요도를 진군하여 규슈로 건너간다. 요시쓰네는 삼일 헤이시의 난 후처리에 쫓기며, 8월 6일,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좌위문소위, 검비위사에 임명되었다. 9월,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의 주선으로 가와고에 시게요리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다.
한편, 노리요리의 원정군은 병량과 병선 조달에 고생하여 진군이 정체되었다. 이 상황을 안 요시쓰네는 고시라카와원에게 사이카이 출진을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1185년 2월, 새로운 군을 편성한 요시쓰네는 폭풍우 속에서 소수의 배로 출격하여 야시마 전투에서 헤이시를 패주시켰다.
노리요리도 규슈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고, 나가토 국히코시마에 있는 헤이시의 후방을 차단했다. 요시쓰네는 수군을 편성하여 히코시마를 향하고, 1185년 3월 24일 다나우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헤이시를 멸망시켰다. 요시쓰네는 법황으로부터 승전을 칭찬받고, 삼종신기를 받들고 4월 24일 교토에 개선한다.
1185년 4월 15일, 요리토모는 자신의 허락 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은 간토 무사들에게 교토에서의 임무 수행을 명령했다. 4월 21일, 가와라노 가게토키는 요시쓰네가 추토의 공을 자기에게만 돌리고 있다는 서신을 요리토모에게 보냈다.[63]
요시쓰네는 다이라노 무네모리 부자를 데리고 5월 7일에 교토를 떠나 가마쿠라로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요시쓰네를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63] 요시쓰네는 5월 24일, 요리토모에게 반역의 뜻이 없음을 호소하는 서신(고시고에장)을 보냈다.
요시쓰네가 요리토모의 분노를 산 원인은 허가없이 관위를 받은 것, 가지와라노 가게토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단으로 일을 진행시킨 것, 규슈에 대한 월권 행위, 휘하의 도고쿠 무사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요리토모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처벌한 것 등이었다. 특히 관위 문제는 요리토모의 존재를 흔드는 것이었다.[64] 또한 단노우라 전투에서 안토쿠 천황이나 니이노아마를 자살로 몰아가고 보검을 잃어버린 일은 요리토모의 전후 구상에 차질을 빚어지게 했다.[65]
요시쓰네의 군사적 재능과 덕망은 무가정권 확립을 목표로 하는 요리토모에게는 위협이었다. 요시쓰네는 인노미큐시에 보임되었을 뿐 아니라 다이라노 도키타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결국 요시쓰네는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했고, 6월 9일에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에게 무네모리 부자를 데리고 교토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요시쓰네는 오미국에서 무네모리 부자를 참수하고, 도다이지에 다이라노 시게히라를 보냈다.[66] 8월 16일에 이루어진 지모쿠에서 요시쓰네는 이요노카미를 겸임하게 된다. 9월, 요리토모는 가지와라노 가게스에를 보내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추토를 요청했지만, 요시쓰네는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10월, 요리토모는 요시쓰네 토벌을 결정하고 도사보노 쇼슌을 교토에 보냈다. 10월 17일, 도사보 등 60여 기가 요시쓰네 저택을 야습(호리카와야토)하지만, 요시쓰네와 유키이에가 반격하여 실패했다. 요시쓰네는 유키이에와 함께 교토에서 요리토모 타도의 기치를 들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10월 18일에 요리토모 추토의 인센을 얻었지만, 요시쓰네에게 찬동하는 세력은 적었다.
29일에 요리토모가 직접 군을 이끌고 요시쓰네 추토에 나서자, 요시쓰네는 규슈행을 꾀했다. 11월 3일 요시쓰네 등은 오가타 고레요시 집안을 의지해 교토를 떠났다. 도중에 셋쓰 겐지의 다다 유키쓰나 등의 습격을 받았다. 6일에 일행은 셋쓰국 오모노우라에서 선단을 짜서 규슈로 가려 했지만, 폭풍으로 난파하여 셋쓰로 밀려왔다. 11월 7일에는 요시쓰네가 가지고 있던 관직을 모두 박탈당했다. 11월 25일에는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잡아들이라는 인센이 내려졌다. 요리토모는 12월, 슈고와 지토의 설치를 요구했고, 호조 도키마사를 통한 조정과의 교섭 끝에 설치를 인정받았다.
요시쓰네는 시즈카 고젠과 함께 요시노에 몸을 숨겼지만, 추토를 받고 시즈카 고젠은 붙잡혔다. 1186년 5월에 이즈미국에서 유키이에가 피살되고 각지에 잠복해 있던 가신들도 차례대로 살해된다. 요시쓰네의 이름이 요시유키(義行)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요시카타(義顯)로 개명당했다.
교토에서 더 발붙일 곳이 없게 된 요시쓰네는 가신들과 함께 다시 오슈에 몸을 의탁한다. 1187년 2월 10일의 기록에 보면 요시쓰네는 히라이즈미에 숨었다고 한다.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요시쓰네를 장군으로 세우고 가마쿠라에 대항하려 했지만, 1187년 10월 29일 병으로 숨을 거둔다. 히데히라가 죽은 뒤 요리토모는 후지와라노 야스히라에게 요시쓰네를 잡아들일 것을 강하게 압력을 가했다.[3] 요시쓰네는 1188년 2월에 데와국에 나타나 가마쿠라측과 전투를 벌이고, 1189년 1월에는 교토로 돌아오려는 의지를 담은 편지를 가진 승려가 붙잡히는 등 재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의 압박에 굴복해, 윤4월 30일, 5백 기의 병사로 고로모가와노타치를 습격했다. 요시쓰네 주종은 모두 10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요시쓰네는 지불당에 들어가 부인과 딸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나이는 31세였다.[3] 무사시보 벤케이는 온몸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요시쓰네를 지키다 선 채로 죽었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2. 1. 탄생과 유년기
요시쓰네는 헤이지(平治) 원년(1159년) 헤이지의 난이 한창이던 중에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도키와 고젠은 구조노인(九條院)에서 일하던 하급 궁인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 이름은 우시와카마루(牛若丸|우시와카마루일본어)였다.[3]아버지 요시토모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와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려 오와리국으로 도망치던 중에 가신의 배반으로 살해되었다. 이때 우시와카(요시쓰네)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도키와는 우시와카와 다른 두 아들을 데리고 야마토국의 산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기요모리에게 붙잡힌 것을 알자 자식들과 함께 기요모리 앞에 출두했고, 자식들은 자라서 출가한다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도키와는 기요모리의 첩이 되었다가 다시 공가(公家) 이치조 나가나리에게 보내져 그와 혼인하였다.
11살 때[57] 우시와카마루는 교토 근교의 구라마데라(鞍馬寺)에 맡겨졌고 자신의 이름을 샤나오(遮那王)라 하였다.[58] 이후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스님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구라마사를 떠나 스스로 원복을 행한 뒤, 오슈의 대호족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찾아간다.
요시쓰네가 오슈로 가게 된 데에는 히데히라의 장인이자 정치자문이었던 후지와라노 모토나리가 어머니 도키와의 남편이었던 이치조 나가나리의 종모제(從兄弟)의 아들이었던 인연으로 그 연줄을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59] 원복을 올린 장소에 대해서는 《헤이지모노가타리(平治物語)》에는 오미국 가모군(蒲生郡)의 카가미노슈쿠(鏡の宿), 《기케이키(義経記)》에는 아버지 요시토모가 최후를 맞은 땅인 오와리국에서 원복을 올렸다고 했으며, 이름은 겐지 연고의 돌림자인 '요시(義)'에 세이와 겐지의 시조인 쓰네모토왕(經基王)의 '쓰네(經)'를 더해 '요시쓰네(義經)'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2. 2. 지쇼ㆍ주에이의 난(겐페이 전쟁)

지쇼 4년(1180년) 8월 17일, 이복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오슈를 떠나 휘하에 참여했다. 히데히라는 요시쓰네가 떠나는 것을 극구 말렸으나, 요시쓰네는 몰래 오슈를 빠져나왔다. 히데히라는 사토 쓰구노부(佐藤繼信)ㆍ다다노부(忠信) 형제 등 수십 기[26]를 붙여 함께 가도록 했다. 후지가와 전투에서 승리한 요리토모는 기세 강(지금의 시즈오카현)에 진을 쳤는데, 이곳에서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와 처음 만났다. 이후 요리토모는 동생 노리요리와 요시쓰네에게 군권을 맡겨 헤이케 토벌에 나섰고, 자신은 동쪽을 다스리는 데 전념했다.
1180년, 요시쓰네는 미나모토 씨의 당주가 된 요리토모가 모치히토 친왕의 요청으로 덴노의 권력을 찬탈한 헤이케(다이라 씨)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헤이케)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겐페이 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시쓰네는 이전까지 만난 적이 없었던 형제인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와 함께 요리토모에게 합류했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기소 요시나카가 헤이시를 몰아내고 입경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헤이시 토벌의 공적으로 요리토모를 으뜸으로, 요시나카를 둘째로 하는 등 요시나카를 낮게 평가하고[27], 요리토모의 상락에 기대를 걸었다. 8월 14일, 요시나카는 계승 천황으로 자신이 추대했던 호쿠리쿠궁을 주장하여 고시라카와원의 분노를 샀다.[27] 고시라카와원이 요시나카를 제치고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요리토모에게 내리면서 양자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요리토모는 윤달 10월 5일에 가마쿠라를 출발했지만, 다이라노 요리모리로부터 교토의 심각한 식량 부족을 듣고 상락을 중단, 요시쓰네와 나카하라 친요를 대관으로 삼아 교토로 보냈다.[28] 『규요』 윤 10월 17일조에는 "요리토모의 동생 구로(실명을 모름)가 대장군이 되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락을 계획한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이 귀족의 일기에 나타난 요시쓰네의 첫 기록이다.
요시쓰네와 지카요시는 11월에 오미 국에 도착했지만, 군세는 500-600기 정도에 불과하여 입경은 어려웠다.[29] 호주사 전투가 발발하고,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원을 유폐했다. 교토의 정세는 고시라카와원 아래, 호쿠면 무사·오에 공조 등에 의해, 이세 국으로 이동했던 요시쓰네·친요에게 전해졌다.[30] 요시쓰네는 비장을 보내 요리토모에게 사태의 급변을 보고하고, 자신은 이세 국인과 와카야마 수·다이라노 노부카네와 연계하여 병력 증강을 도모했다. 요시쓰네의 랑당인 이세 요시모리도 이세의 지방 무사로 이때 요시쓰네를 따랐다고 추측된다. 이듬해 주에이 3년(1184년), 노리요리가 관동으로부터 원군을 이끌고 요시쓰네와 합류, 정월 20일, 노리요리 군은 오미 세타에서, 요시쓰네군은 산조 다하라에서 총공격을 시작한다. 요시쓰네는 우지가와 전투에서 시다 요시히로의 군세를 무찔러 입경하고, 패주한 요시나카는 아와즈 전투에서 토벌당했다.
요시쓰네는 노리요리와 함께 여러 주요 전투에서 다이라 씨를 물리쳤다. 1184년 초 요리토모의 명령에 따라 미나모토 씨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던 사촌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아와즈 전투[5](현재의 오미 국)에서 공격하여 죽였다.
이 사이 헤이시는 사이카이에서 세력을 회복, 후쿠하라(효고현고베시)까지 다가왔다. 요시쓰네는 노리요리와 함께 헤이시 토벌을 명령받고, 2월 4일, 요시쓰네는 협공군을 이끌고 하리마 국으로 우회, 미쿠사야마 전투에서 야습으로 다이라노 스케모리 등을 격파하고, 노리요리는 주력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2월 7일,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요시쓰네는 정예 70기를 이끌고, 효도이 고스의 험준한 절벽에서 역낙하를 시도하여 헤이시 본진을 기습한다. 헤이시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가마쿠라군은 대승을 거두었다.[31] 상락할 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요시쓰네는, 요시나카 토벌·이치노타니 전투의 활약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장군의 지위를 받은 요시쓰네는 1184년 3월 현재의 고베시에서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다이라 씨를 물리쳤고, 1185년 3월에는 시코쿠의 야시마 전투에서 다시 한번 승리했다. 마침내 그는 한 달 후 현재의 야마구치현에서 다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씨를 멸망시켰다.[3]
아와즈 전투[5] 이후 요시쓰네는 오미 국을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치노타니 전투 후, 노리요리는 가마쿠라로 돌아가고, 요시쓰네는 교토에 남아 치안 유지, 기나이 근국의 지방 무사 조직화 등 지방 군정을 실시하고, 사찰 소령 관계 재판 등 민정에도 관여했다. 겐랴쿠 원년(1184년) 6월, 조정의 소제목이 행해지고, 요리토모의 추천으로 노리요리 등 源氏 3명이 국사에 임명되었지만, 요시쓰네는 국사에 임명되지 않았다.
요시쓰네는 그 후, 헤이시 토벌을 위해 사이카이에 출진할 예정이었지만 8월 6일, 삼일 헤이시의 난이 발발하여 출진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 때문에 사이카이로의 출진은 노리요리가 맡게 된다.
8월, 노리요리는 대군을 이끌고 산요도를 진군하여 규슈로 건너간다. 요시쓰네는 삼일 헤이시의 난 후처리에 쫓기고 있으며, 8월 6일,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좌위문소위, 검비위사에 임명되었다. 9월,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의 주선으로 가와고에 시게요리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다.
한편, 노리요리의 원정군은 병량과 병선 조달에 고생하여 진군이 정체된다. 이 상황을 안 요시쓰네는 고시라카와원에게 사이카이 출진을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겐랴쿠 2년(1185년) 2월, 새로운 군을 편성한 요시쓰네는 폭풍우 속에서 소수의 배로 출격한다. 보통 3일 걸리는 거리를 수 시간 만에 도착, 사누키 국 세토 내해 연안의 헤이시 거점 야시마를 기습하고, 산과 민가를 불태워 대군으로 위장하는 작전으로 헤이시를 패주시켰다(야시마 전투).
노리요리도 규슈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고, 마지막 거점인 나가토 국히코시마에 있는 헤이시의 후방을 차단했다. 요시쓰네는 수군을 편성하여 히코시마를 향하고, 3월 24일(서력 4월) 다나우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헤이시를 멸망시켰다.
숙원을 이룬 요시쓰네는 법황으로부터 승전을 칭찬하는 칙사를 받고, 이치노타니, 야시마 이상의 대공을 세운 주역으로서, 헤이시로부터 되찾은 거울옥새를 받들고 4월 24일 교토에 개선한다.
2. 3. 교토 체류와 헤이시 추토
겐랴쿠 원년(1184년) 이치노타니 전투 이후, 미나모토노 노리요리는 가마쿠라로 돌아갔지만,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교토에 남아 치안 유지에 힘쓰며 기나이 지역 무사들을 조직하고, 사찰 소유 영지 분쟁이나 민정에도 관여했다.[6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추천으로 노리요리 등 겐지 무장 3명이 지방관에 임명되었지만, 요시쓰네는 제외되었다.[61]이후 요시쓰네는 헤이시 추토를 위해 서쪽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1184년 8월 6일 다이라노 노부카네가 일으킨 '3일의 헤이시의 난'으로 출정하지 못하고, 노리요리가 서쪽 출진을 맡게 되었다.[62] 노리요리는 대군을 이끌고 산요도로 진군해 규슈로 향했고, 요시쓰네는 3일의 헤이시의 난 후처리에 바빴다. 이 와중에 8월 6일,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사에몬쇼이(左衛門少尉)ㆍ게비이시(檢非違使)에 임명되었다. 9월에는 요리토모의 주선으로 가와고에 시게요리의 딸인 사토 고젠을 정실로 맞이했다.
한편, 노리요리의 원정군은 군량과 병선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진군이 정체되었다. 이에 요시쓰네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서쪽 출진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185년 2월, 새로운 군을 편성한 요시쓰네는 폭우를 뚫고 소수의 배로 출격, 빠른 속도로 시코쿠 사누키국의 세토나이카이에 있던 헤이시 거점 야시마를 기습했다. 산과 민가를 불태워 소수의 군사를 대군으로 보이게 하는 작전으로 헤이시를 도망치게 했다. 노리요리도 규슈 도해에 성공하여 헤이시 최후 거점인 나가토국 히코시마의 배후를 차단했다. 요시쓰네는 수군을 편성해 히코시마로 진격, 음력 3월 24일 단노우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헤이시를 멸망시켰다.
숙원을 이룬 요시쓰네에게 전승을 치하하는 법황의 칙사가 도착했고, 이치노타니, 야시마 전투 등에서의 공훈으로 헤이시로부터 빼앗은 삼종신기(검은 물속에 가라앉아버렸다)를 받들고 4월 24일에 교토로 개선했다.
2. 4. 요리토모와의 대립과 몰락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사이가 벌어져 쫓기는 신세가 된 요시쓰네는 결국 조정으로부터 적으로 몰리게 된다.1185년 4월 15일, 요리토모는 자신의 허락 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은 간토 무사들에게 교토에서의 임무 수행을 명령하여 사실상 그들의 귀환을 금지했다. 또한 4월 21일, 헤이시 추토에서 사무라이도코로의 쇼시(所司)로서 요시쓰네의 보좌를 맡았던 가와라노 가게토키는 "요시쓰네는 시종 추토의 공을 자기에게만 돌리고 있습니다."라는 서신을 요리토모에게 보냈다.[63]
한편 요시쓰네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잡은 다이라노 무네모리ㆍ기요무네 부자를 데리고 5월 7일에 교토를 떠나 가마쿠라로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요시쓰네에게 불신을 품은 요리토모는 무네모리 부자만을 가마쿠라에 들였을 뿐, 요시쓰네는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63] 이때 가마쿠라 교외의 야마우치 장(山內莊) 고시고에(현 가마쿠라시) 만푸쿠지(満福寺)에 유치된 요시쓰네는 5월 24일, 형 요리토모에게 자신에게는 반역의 뜻이 전혀 없음을 호소하는 서신을 요리토모의 측근 오에노 히로모토를 통해 요리토모에게 보냈다. 이것이 유명한 고시고에장이다.
요시쓰네가 요리토모의 분노를 산 원인은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허가없이 관위를 받은 것 외에도, 헤이시 추토에서 군감으로서 요리토모를 섬기던 가지와라노 가게토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단으로 일을 진행시킨 것, 단노우라 전투 이후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의 관할인 규슈에 대한 월권 행위, 휘하의 도고쿠 무사들에게는 사소한 잘못도 놓치지 않고 심하게 책망하며, 요리토모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처벌하여 무사들의 미움을 사는 등의 잦은 독단적 행동 때문이었다. 주로 사이고쿠 무사들을 인솔해 헤이시를 멸한 요시쓰네의 많은 전공은, 은상을 바라고 요리토모를 따랐던 도고쿠 무사들이 전공을 세워 은상을 받을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했고,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기반이었던 도고쿠 고케닌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요리토모의 허가도 없이 관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아직 관위를 수여받을 지위가 되지 못했던 요리토모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었다.[64] 또한 단노우라 전투에서 요시쓰네의 성급한 공격으로 안토쿠 천황이나 니이노아마(二位尼)를 자살로 몰아가고 조정과의 거래 재료로도 써먹을 수 있었던 보검을 잃어버린 일은 요리토모의 전후 구상에 차질이 빚어지게 했다.[65]
요시쓰네의 군사적 재능과 덕망이 법황의 신용을 사고 또 무사들의 인심을 모으는 것은 무가정권 확립을 목표로 하는 요리토모에게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요시쓰네는 단노우라에서 개선한 뒤 일찍이 헤이시가 독점해왔던 인세이(院政)의 군사적 뒷받침으로서 기능해온 인노미큐시(院御厩司)에 보임되었을 뿐 아니라 헤이시의 포로인 다이라노 도키타다의 딸 와라비히메를 아내로 맞이했다. 한때 헤이시가 지녔던 전통적 지위를 요시쓰네가 이어받으려 한, 혹은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이 그에게 잇도록 하려는 움직임은 요리토모가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요시쓰네는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했고, 6월 9일에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에게 무네모리 부자와 다이라노 시게히라를 데리고 교토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요리토모를 깊이 원망하게 된 요시쓰네는 "간토에 불만을 품은 자가 있거든 요시쓰네에게로 오라"고 말해버렸다. 이를 들은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의 영지를 죄다 몰수했다. 요시쓰네는 오미국에서 무네모리 부자를 참수하고, 시게히라를 앞서 시게히라 자신이 직접 불태웠던 도다이지에 보냈다.[66] 이 와중인 8월 16일에 이루어진 지모쿠에서 이른바 겐지 6인의 서위 임관에서 요시쓰네는 이요노카미를 겸임하게 된다. 한편 9월에 이르러, 요리토모는 교토의 로쿠조 호리카와 저택에 있는 요시쓰네의 모습을 찾도록 가지와라노 가게토키의 적남 가지와라노 가게스에를 보내어 일찍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따랐던 숙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추토를 요청했지만, 요시쓰네는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10월, 요시쓰네의 병은 핑계이며, 이미 그가 유키이에와 내통하고 있다고 판단한 요리토모는 요시쓰네 토벌을 결정하고 게닌(家人)인 도사보노 쇼슌을 교토에 보냈다. 10월 17일, 도사보(土佐坊) 등 60여 기가 교토의 요시쓰네 저택을 야습(호리카와야토(堀川夜討))하지만, 스스로 문을 나와서 응전하는 요시쓰네에 유키이에가 가세하여 전투는 습격한 측의 패배로 끝났다. 붙잡힌 쇼슌으로부터 이 야습이 요리토모의 명임을 알게 된 요시쓰네는 쇼슌을 죽이고 유키이에와 함께 교토에서 요리토모 타도의 기치를 들었다. 그들은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다시 주상하여, 10월 18일에 요리토모 추토의 인센을 얻었지만, 요리토모가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공양하는 법요를 24일 열면서 가신을 모은 적도 있었으므로 요시쓰네에게 찬동하는 세력은 적었다. 교토 주변의 무사들도 요시쓰네에게 가담하기는커녕 거꾸로 적대시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또한 이후 법황이 요시쓰네 추토의 인센을 내면서 요시쓰네는 더욱 궁지에 빠졌다.
29일에 요리토모가 직접 군을 이끌고 요시쓰네 추토에 나서자, 요시쓰네는 서쪽에서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규슈행을 꾀했다. 11월 1일에 요리토모가 스루가국의 기세가와(黄瀬川)에 이르렀고, 11월 3일 요시쓰네 등은 규슈의 오가타 고레요시(緒方惟栄) 집안을 의지해, 3백 기를 이끌고 교토를 떠났다. 도중에 셋쓰 겐지의 다다 유키쓰나 등의 습격을 받아 이를 격퇴하기도 했다. 6일에 일행은 셋쓰국 오모노우라(大物浦,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선단을 짜서 규슈로 가려 했지만, 도중에 폭풍으로 난파하는 바람에 주종은 흩어지고 셋쓰로 밀려와 버렸다. 이로써 요시쓰네가 규슈로 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11월 7일에는 요시쓰네가 가지고 있던 관직을 모두 박탈당했다. 11월 25일에는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잡아들이라는 인센이 여러 구니마다 내려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리토모는 12월, 앞서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작성했던 자나 친요시쓰네파 구교들을 해임하게 하고, 요시쓰네 등의 추포를 위해 여러 구니에 슈고와 지토의 설치를 요구했고, 요시쓰네 대신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교토에 들어온 호조 도키마사를 통한 조정 사이의 교섭 끝에, 설치를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요시쓰네는 그의 가신들이나 애첩인 시라뵤시 시즈카 고젠과 함께 요시노에 몸을 숨겼지만, 여기에서도 추토를 받고 시즈카 고젠은 붙잡혔다. 도망친 요시쓰네는 반(反)가마쿠라파 귀족이나 지샤(寺社)의 도움으로 교토 주변에 숨기도 했지만, 이듬해(1186년) 5월에 이즈미국에서 숙부 유키이에가 가마쿠라측에 피살되고 각지에 잠복해 있던 가신들도 차례대로 발각되어 살해된다. 그러한 가운데, 요시쓰네의 이름이 요시쓰네에서 요시유키(義行)로 개명되었다가(《교쿠요》 5월 10일조) 다시 요시카타(義顯)로 개명당하고 있는데(《아즈마카가미》 11월 24일조) 모두가 요리토모의 의향에 의한 것으로 조정 측에서의 소식일 뿐, 요시쓰네 본인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인이나 귀족들이 요시쓰네를 일부러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 요리토모는 같은 해 11월에 "교토측에서 요시쓰네 편을 들겠다면 대군을 보낼 것"이라며 협박하기도 했다.
교토에서 더 발붙일 곳이 없게 된 요시쓰네는 가신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오슈(奥州)에 몸을 의탁한다. 《아즈마카가미》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의 기록에 보면 요시쓰네는 추포망을 뚫고 이세국ㆍ미노국을 지나 오슈로 향했는데, 일행은 도다이지 재건을 위한 권진 일행으로 변장하고서 정실 사토 고젠과 딸을 데리고 히라이즈미에 숨었다고 한다.
2. 5. 오슈 피신과 최후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간토 서쪽을 제패한 요리토모의 세력이 오슈에까지 미치는 것을 경계하여, 요시쓰네를 장군으로 세우고 가마쿠라에 대항하려 했지만, 분지 3년(1187년) 10월 29일 병으로 숨을 거둔다. 히데히라가 죽은 뒤 요리토모는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에게 요시쓰네를 잡아들일 것을 조정을 통해 강하게 압력을 가했다.[3] 한편 요시쓰네는 분지 4년(1188년) 2월에 데와국에 나타나 가마쿠라측과 전투를 벌이고, 이듬해(1189년) 1월에는 교토로 돌아오려는 의지를 담은 요시쓰네의 편지를 가진 히에이 산의 승려가 붙잡히는 등 여러 모로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하지만 야스히라는 세 번에 걸친 가마쿠라의 압박에 굴복해, '요시쓰네의 지시를 따르라'고 했던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윤4월 30일, 5백 기의 병사로 요시쓰네 주종이 있던 후지와라노 모토나리의 고로모가와노타치(衣川館)를 습격했다. 이때 요시쓰네 주종은 모두 10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요시쓰네의 노토들은 차례차례 죽임을 당했고, 포위당한 요시쓰네는 일체의 싸움도 하지 않은 채 지불당에 들어가 부인 사토 고젠과 그 딸(당시 네 살)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나이는 31세였다.[3] 또한 요시쓰네의 가신이었던 무사시보 벤케이는 온몸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요시쓰네를 지키다 선 채로 죽었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3. 전설과 대중문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사람들의 동정(호간비이키)을 받아 일본에서 영웅으로 묘사되었고, 많은 전설이 만들어졌다.
요시쓰네와 관련된 유명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전설들은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쓰여진 《기케이키(義經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특히 《육도》 중 〈호권(虎巻)〉을 배운 요시쓰네가 지쇼·주에이의 난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설은 일본에서 성공을 위한 필독서를 '''도라노마키'''(虎の巻일본어)라고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요시쓰네와 그의 무술 스승으로 알려진 기이치 호겐으로부터 전해졌다고 하는 무술 유파도 존재한다.
3. 1. 요시쓰네-칭기즈 칸 설
요시쓰네가 에조치를 통해 대륙을 건너 칭기즈 칸이 되었다는 전설(:ja:義経=ジンギスカン説)이 있다.호간비키(약자를 동정하는 심리)는 훗날 요시쓰네가 오슈 방향으로 북쪽으로 도주했다는 불사설과 북행설을 낳았는데, 이러한 전설의 원형은 무로마치 시대에 지어진 단편 소설인 《오토기조시》 설화로 추정된다. 이 설화는 요리토모 거병 이전에 청년 시대였던 요시쓰네가 당시 오시마(渡島)라고 불리던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괴이한 일을 겪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일본에서 에조치(홋카이도)의 아이누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기누가와로 피난을 간 요시쓰네가 에조치로 건너가 아이누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로 바뀌게 된다.
요시쓰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아이누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할복하지 않았고 고로모가와의 포위망을 빠져나가 홋카이도로 도망쳐 오키쿠루미/오이나카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요시쓰네는 죽음을 모면한 후 홋카이도를 지나 아시아 본토로 건너가 칭기스칸으로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879년 스에마쓰 겐초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학 중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7]
“'''요시쓰네 북방(북행) 전설'''”은 무로마치 시대의 오토기조시에 보이는 『고소시토와타리』설화가 원형이라고 생각된다. 요리토모 봉기 이전의 청년 시절 요시쓰네가 당시 “와타리시마”라고 불렸던 홋카이도로 건너가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을 경험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설화는 나중에 이야기꾼들의 에조지 아이누에 대한 지식이 깊어짐에 따라, 고로모가와에서 화를 면한 요시쓰네가 에조지로 건너가 아이누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로 변화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아이누의 인문신인 오키쿠르미는 요시쓰네, 종자의 사마이쿠루는 벤케이라고 하여, 아이누 동화 정책에도 이용되었다. 샤쿠샤인은 요시쓰네의 후예라는 설도 있었다.
이러한 전설을 강화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록으로, 에도 막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의 『속본조통감』이 있다. 기록에는 “혹왈, 의하지역요시쓰네불사, 도도에조도기유종존간금(혹은 말하기를, 고로모가와의 전투에서 요시쓰네는 죽지 않고, 에조섬으로 도망쳐 그 자손을 남겼다)”라고 적혀 있다.
이 북행 전설의 연장선상에서 막말 이후 근대에 등장한 것이 바로, 요시쓰네가 에조치를 거쳐 대륙으로 건너가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요시쓰네=칭기스칸설”이다.
이 전설의 싹은 역시 일본인의 시선이 북방으로 향하기 시작한 에도 시대에 있다. 청나라 건륭제의 어문에 “짐의 선조의 성은 源(겐), 이름은 義経(요시쓰네)이다. 그 조상은 청화에서 나왔으므로 국호를 청으로 하였다”라고 적혀 있었다거나, 12세기에 번영했던 금의 장군에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라는 자가 있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에도 시대 초기에 사와다 겐나이가 발행한 『금사별본』의 일본어 번역이 시초이다.[54]
이처럼 에도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요시쓰네가 대륙으로 건너가 여진족(만주족)이 되었다는 풍설에서, 메이지 시대가 되자 요시쓰네가 칭기스칸이 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에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의 저서 『일본』을 유학지 런던에서 읽은 스에마쓰 겐초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논문에서 “대정복자 칭기스칸은 일본의 영웅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동일인물이다”라는 논문을 쓰고, 『의경재흥기』(메이지사학회잡지)로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어 붐을 일으켰다.
다이쇼 시대에 미국에서 유학하고 목사가 되었던 오다니베 젠이치로는 홋카이도로 이주하여 아이누 문제에 대처하고 있었는데, 아이누 사람들이 믿는 문화의 신인 오키쿠르미의 정체가 요시쓰네라는 이야기를 듣고, 요시쓰네 북행 전설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대륙으로 건너가 만주・몽골을 여행했다. 그는 이 조사에서 요시쓰네가 칭기스칸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1924년에 저서 『칭기스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이다』를 출판했다. 이 책은 판관비희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대 일본에서 요시쓰네=칭기스칸설이 알려져 있는 것은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이다.
이러한 칭기스칸설은 메이지 시대 학계에서 입이전설을 포함하여 철저히 부정되었고, 학계에서 제대로 다루어진 적은 없었지만, 학설을 넘어선 전설로서 굳건히 남아, 동서는 쇼와 초기까지 증쇄를 거듭했고, 증보판도 출판되었다. 이 책이 받아들여진 배경으로는 일본인의 판관비희의 심정뿐만 아니라, 옛날 입이전설의 형성이 에도 시대의 에조치에 대한 관심과 표리가 된 것처럼, 영토 확장, 대륙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당시 일본 사회의 풍조가 있었다.
현재는 후년의 연구 결과나, 칭기스칸의 대략적인 출생년도와 아버지의 이름도 「원조비사」 등에서 분명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칭기스칸설은 학술적으로는 완전히 부정된 설이다'''.
3. 2. 대중문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대하드라마를 포함한 다양한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명 인물이다.

요시쓰네는 일본 문학과 문화에서 오랫동안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 고전 문학 작품인 헤이케 모노가타리(헤이케 이야기) 3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영웅에 대한 동정심을 뜻하는 일본어 "호간비키"(Hōgan-biiki|판관贔屓|일본어)는 궁정으로부터 받은 요시쓰네의 칭호인 "구로 호간"(九郎判官일본어)에서 유래한다.
요시쓰네가 등장하는 많은 문학 작품들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요시쓰네에 관한 전설은 14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초기 작품에서는 요시쓰네가 기민한 군사 지도자로 묘사되었다.[10] 그 후 사람들이 그에 대해 더 알게 되면서 그의 어린 시절과 생애 말년에 관한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그의 공적 생애를 다룬 전설들은 요시쓰네를 위대하고 덕 있는 무사로 보여준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명예롭지만 순진한 면모도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된다.[2]
요시쓰네의 어린 시절을 다룬 전설들은 어린 요시쓰네(혹은 우시와카마루)를 영웅적인 인물로 보여준다. 그는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숙련된 검객으로 묘사된다. 그는 음악과 학문에도 능했고,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이러한 전설들은 그의 후반 생애에 관한 전설보다 더 환상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10]
이복형인 요리토모가 그에게 등을 돌렸을 때를 다룬 전설들은 요시쓰네의 영웅적인 면모를 다소 덜어낸다. 그는 더 이상 위대한 무사로 묘사되지 않지만, 궁정에서 가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유지한다.[10]
요시쓰네가 아타카 장벽을 탈출하는 이야기는 노(能)극인 아타카와 가부키 극인 간진초의 소재가 된다.[2] 간진초는 나중에 구로사와 아키라에 의해 1945년 영화 호랑이꼬리를 밟은 사나이들로 각색되었다.
기케이키(요시쓰네 연대기)는 헤이케 패배 후 요시쓰네의 삶의 사건들을 다룬다.[2] 헤이케 이야기와 기케이키 외에도 수많은 문학 작품과 극에서 그를 다루고 있으며, 이들은 함께 요시쓰네의 "세계"(세카이, sekai)를 형성하는데, 이는 문학적 순환 개념과 유사하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요시츠네 신 타카다치 (정가극(じょうるり), Bunraku)
- 요시츠네 센본자쿠라(정가극(じょうるり), Bunraku 및 가부키(Kabuki))
- 간진초(가부키(Kabuki))
시각 예술에서 요시츠네는 일반적으로 미소년(美少年, bishōnen)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당시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와는 상반된다. 의경에 대한 인기는 매우 높아서, 대표적인 군기물(軍記物語)인 의경기(義経記)가 그의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편찬될 정도였으며, 의경 또는 그의 주종(主従)을 소재로 한 "의경물(義経物)" 또는 "판관물(判官物)"이라 불리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19] 요곡(謡曲)에는 30여 곡, 행약무(幸若舞)에는 19곡의 "판관물"이 있다.[56] 또한 너무나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의경과 관련 없는 연극에서도 "현현(出現)하신 의경공(義経公)"이라는 대사와 함께 의경이 등장하고, "별다른 용무가 없다면"이라는 대사와 함께 그냥 물러나는 연출도 행해졌다.[19]
- 군기
- * 義経記(연예군기) 저자 미상, 성립 - 무로마치 시대 초기
- 오가사소시
- * 御曹子島渡 저자 미상, 성립 - 무로마치 시대 초기
- * 천구의 대리 저자 미상, 성립 - 무로마치 시대 초기
- 노
- * 팔섬 저자 세아미, 성립 - 무로마치 시대
- * 船弁慶 저자 관세 신미쓰, 성립 - 무로마치 시대
- * 안타쿠 저자 관세 신미쓰 추정, 성립 - 무로마치 시대
- * 쿠라마텐구 저자 미야마스 추정, 성립 - 무로마치 시대
- * 다리 벤케이 저자 미상, 성립 - 무로마치 시대
- * 에보시오리 저자 미상, 성립 - 무로마치 시대 (참고: [https://kotobank.jp/word/%E7%83%8F%E5%B8%BD%E5%AD%90%E6%8A%98-446385 세계백과사전 제2판 "에보시오리"][http://www.town.ryuoh.shiga.jp/yoshitune/genpuku/youkyoku-eboshi.html 류오정 "에보시오리"])
- 분라쿠・정루리・가부키
- * 의경천본벚꽃 (인형정루리・가부키) 저자 2대 다케다 이즈모・미요시 쇼라쿠・나미키 센류, 성립 - 엔쿄 4년(1747년)
- * 일곡눈군기(인형정루리・가부키) 저자 나미키 소스케 외, 성립 - 호레이 1년(1751년)
- * 권진장(가부키) 저자 나미키 고헤이, 성립 - 덴포 11년(1840년)
- 춘본
- * 단노우라 야합전기 저자 라이산요 추정, 성립 - 에도 시대
- 대중문화 (현대의 드라마, 소설, 만화 등)
- 무쌍오로치
4. 평가
源義経일본어는 죽은 후 수백 년 동안 다양한 전설이 생겨나 실제 모습과는 다른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사료에 남겨진 源義経일본어 자신의 언동과 직접 관련된 인물의 평가를 제시한다.
- 『아즈마카가미』 治承일본어 4년(1180년) 10월 21일조에 따르면, 奥州일본어에 있던 義経일본어가 頼朝일본어의 거병 소식을 듣고 급히 합류하려 하자, 藤原秀衡일본어는 義経일본어를 강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義経일본어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갔고, 秀衡일본어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체념하고 佐藤兄弟일본어를 義経일본어에게 보냈다.
-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養和일본어 원년(1181년) 7월 20일, 鶴岡若宮宝殿일본어 상량식에서 頼朝일본어는 義経일본어에게 목수에게 줄 말을 끌라고 명령했다. 義経일본어가 "마침 아랫사람을 부릴 사람이 없다(자신의 신분에 맞는 사람이 없다)"라며 거절하자, 頼朝일본어는 "畠山重忠와 佐貫広綱가 있다. 천한 역할이라 생각하여 여러 이유를 대며 거절하는 것이냐"라며 격노했다. 義経일본어는 몹시 두려워하며 즉시 말을 끌었다.
- 『교쿠요』에 따르면, 寿永일본어 3년(1184년) 2월 9일 이치노타니 전투 후, 義経일본어는 베어낸 平氏일본어 일문의 목을 도읍에 보내 효수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으로 도읍에 돌아왔다. 조정은 平氏일본어가 황실의 외척이므로 효수를 반대했지만, 義経일본어와 範頼일본어는 이것이 자신들의 숙원(아버지 義朝일본어의 복수)이며 "義仲의 목은 보내면서 平家일본어의 목은 보내지 않는 것은 이유가 없다. 어째서 平家일본어를 옹호하는가. 매우 불신이다"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공경들은 義経일본어 등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13일에 平氏일본어의 목은 도읍을 지나 효수되었다.
- 『깃키』 元暦일본어 2년(1185년) 정월 8일조에 따르면, 平氏일본어 잔당을 두려워한 귀족들은 시코쿠로 平氏일본어 토벌을 떠나는 義経일본어에게 도읍에 남을 것을 요청했지만, 義経일본어는 "2, 3월이 되면 군량이 떨어진다. 範頼일본어가 만약 돌아가게 되면 시코쿠 무사들은 平家일본어에 붙어 더욱 중대한 일이 된다"라며 귀족들을 뿌리치고 출진했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2월 16일 屋島로 출진하는 義経일본어의 숙소를 방문한 高階泰経(고시라카와인의 사자)가 "나는 병법에 밝지 않지만, 대장은 선봉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차장을 보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義経일본어는 '''"특별히 생각하는 바가 있어 선봉에서 목숨을 버리고자 한다"'''라고 답하고 출진했다. 『아즈마카가미』의 필자는 이를 평가하며 "매우 강한 병사라고 해야 할까"라고 적었다. 또한 18일, 義経일본어는 배로 바다를 건너려 했지만, 폭풍우로 배가 많이 파손되었다. 병사들은 배를 한 척도 내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義経일본어는 "조적을 토벌하는 것이 늦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풍우의 어려움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라고 말하며 심야 2시, 폭풍우 속에서 소수의 배로 출격하여 보통 3일 걸리는 거리를 4시간 만에 도착했다.
- 단노우라 전투 후 도착한 義経일본어의 전횡을 비판하는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서장[34]을 받고, 『아즈마카가미』는 '''"독단적인 생각으로 어지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행동하여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이 景時뿐만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한편 義経일본어의 자결 후, 景時와 和田義盛 등 20기가 그 목을 검사할 때, '''"보는 자 모두 눈물을 닦으며 옷을 적셨다"'''라고 하여 義経일본어에 대한 비판과 애석함이 동시에 나타난다.
- 단노우라 전투 후, 義経일본어를 몰래 불러 전투 상황을 들은 닌나지 守覚法親王의 기록 『사키』에 "그는 단순한 용사가 아니다. 장량·삼략·진평·육기, 그 기예를 지니고 그 도를 얻은 자(義経는 평범하지 않은 용사로 무예·병법에 정통한 인물)"라고 적혀 있다.
- 『교쿠요』·『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頼朝일본어와 대립한 義経일본어는 文治일본어 원년(1185년) 10월 11일과 13일에 고시라카와인을 찾아가 "頼朝가 죄 없는 숙부를 죽이려 하여, 行家도 모반을 꾀했다. 자신은 어떻게든 제지하려 했지만, 도저히 승낙하지 않아 義経일본어도 동의했다. 그 이유는 자신은 頼朝의 대관으로서 목숨을 걸고 세 번이나 큰 공을 세웠음에도, 頼朝는 상은커녕 자신의 영지에 지토를 보내 국무를 방해하고 영지를 모두 몰수했다. 이제 살 희망도 없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스노마타 부근에서 한 번 싸워 생사를 결정하고 싶다. 頼朝 토벌의 선지를 받고 싶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둘 다 자결하겠다"라고 말했다. 원은 놀라 거듭 行家를 제지하라고 명했지만, 16일 "역시 行家에 동의했다. 이유는 전과 같다. 지금으로서는 頼朝 토벌의 선지를 받고 싶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몸을 빼 진제로 가고 싶다"라고 말하며, 천황·법황 이하 공경들을 데리고 하향할 기세였다고 한다.
- 궁지에 몰린 義経일본어가 平氏일본어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처럼 횡포를 부릴까 도읍 전체가 소란스러워졌지만, 義経일본어는 11월 2일 시코쿠·규슈 장원 지배 권한을 주는 원선(院宣)을 얻고, 3일 이른 아침에 원에게 사자를 보내 "가마쿠라의 견책을 피하기 위해 진제로 간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싶지만, 무장한 몸이라 이대로 출발한다"라고 인사하고 조용히 도읍을 떠났다. 『교쿠요』의 주인인 구조 가네자네는 頼朝파였지만, 義経일본어의 평온한 교토 퇴거에 대해 '''"원 안팎의 모든 집안이 모두 편안하다. 義経일본어의 소행은 참으로 의사라고 할 만하다. 도읍의 귀천을 막론하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義経일본어는 큰 공을 세우고 그 대가도 없었지만, 무용과 인의에 있어서는 후세에 좋은 이름을 남길 것이다. 칭찬해야 한다"'''라고 칭찬했다.
; 가마쿠라와의 관계
사토 신이치는 頼朝일본어(요리토모)와 義経일본어(요시쓰네)의 대립에 대해, 鎌倉 정권 내부에는 간토의 유력한 고케닌을 중심으로 한 "'''동국 독립파'''"와 頼朝일본어의 측근과 교토 출신 관료들인 "'''친교토파'''"가 병립하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義経일본어은 頼朝일본어의 동생이며, 헤이시(平氏) 토벌의 협공 대장과 교토 대관에 임명되는 등 측근 중에서도 가장 중용되었다. 상락 후에는 조정과의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무사 난폭 행위 중지에 종사하고 있으며, 頼朝일본어의 친교토 정책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 후, 간토의 유력 고케닌으로 편성된 노리요리(範頼) 군이 반년이 걸려도 헤이시를 무찌르지 못하는 가운데, 義経일본어은 서국의 수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약 2개월 만에 헤이시를 멸망시켰다. 이 결과, 정책 결정의 장에서도 공훈에 대한 상의 분배에서도 친교토파의 발언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동국 독립파는 반발하여 친교토 정책의 첨병이었던 義経일본어을 규탄했다. 頼朝일본어는 지지 기반인 유력 고케닌을 붙잡아 두기 위해, 義経일본어에게 준 영지를 몰수하여 고케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합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각한 義経일본어은, 서국 무사를 결집하여 鎌倉 정권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上横手雅敬는 가마쿠라 막부 편찬인 『아즈마카가미』에 의문을 제기하며, 의경의 무단 임관 문제가 교활한 고시라카와 법황이 의경을 이용하여 요리토모와의 이반을 꾀하고, 의경이 그에 휘말린 결과라는 정설을 비판하고 있다.
;임관 문제
: 요리토모가 의경을 헤이시 토벌에 파견하지 않은 것은 무단 임관에 대한 제재가 아니라, 교토의 치안 유지에 의경이 필요했고 공가 측의 강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시라카와인은 의경의 치안 유지 활동에 기대를 걸고 검비위사·좌위문위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 결과, 의경은 고시라카와인의 측근으로 편성되게 되어, 막부에 대한 봉사가 불가능해졌고, 그것이 요리토모의 분노를 불렀다. 더욱이 단노우라 전투 후, 의경을 가마쿠라에서 구속하지 않고 교토로 돌려보낸 것은, '''인구묘사(院御厩司)'''에 보임되어 인의 측근이 된 의경을 이용하여 고시라카와인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리토모는 고시라카와인을 요리토모 토벌의 선지를 내릴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인 결과, 많은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판관 비희와 아즈마가가미
: 또한 전설 속 의경의 모습에는 그림자가 있고 감상적이지만, 실제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의경은 밝고 활달한 용사이며, 어떤 그늘도 없다. 그런데 막부 편찬인 『아즈마카가미』는 반역자여야 할 의경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며, 의경의 심정에 들어가 있는 묘사가 많이 보이고, "'''판관 비희(判官贔屓)'''"의 정도가 강하다. 요리토모에 대해서는 동생들에 대한 냉혹함을 감추려 하지 않고, 시즈카의 춤 장면에서는, 늠름한 시즈카와 호조 마사코에 대해, 편협하고 완고한 요리토모라는 묘사는 악의적인 것이다. 또한, 의경을 참언한 카지와라 카게토키를 악인으로 단정짓고 있다. 카게토키는 호죠씨에 의해 막부에서 추방된 인물이다. 『아즈마카가미』는 "판관 비희"의 구도를 만들어, 원씨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호죠씨의 입장을 정당화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菱沼一憲(국립역사민속박물관 연구협력원)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 임관 문제*
:조정과의 대립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즈마카가미』겐랴쿠 원년(1184년) 8월 17일조에는 같은 해 8월 6일, 형의 허락 없이 관직을 받은 것으로 인해 요리토모의 분노를 사 추토사(追討使) 임명이 유예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같은 『아즈마카가미』8월 3일조에 따르면, 8월 3일,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에게 이세국의 평신겸 추토를 지시하고 있으므로, 임관 이전에 요시쓰네는 서해 원정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같은 달 26일, 요시쓰네는 평씨 추토사의 관문을 받고 있다.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평씨 추토사의 관문을 받은 것이 같은 달 29일이므로, 그보다 빠르다. 즉, 요시쓰네가 평씨 추토사 임명이 유예되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즈마카가미』17일조는 요시쓰네 실각 후, 그 설명을 위해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 전술가로서*
:요시쓰네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였다. 어떤 전투에서도 신이 내린 용기나 행동력이 아니라, 철저하고 합리적인 전략과 그 실행에 의해 승리한 것이다.
:이치노타니 전투에서는, 요시쓰네는 야습으로 산소산의 헤이케 군을 격파한 후, 헤이케의 근거지였던 히가시하리마를 제압하면서 진군했다. 이것은 헤이케 군의 단바 루트를 통한 상락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요시쓰네 자신의 보고에 따르면, 서쪽 이치노타니구치에서 공격해 들어왔으므로, 적은 병력으로 낭떠러지를 내려가는 무모한 작전은 실시하지 않았다.
:야시마 전투에서는, 수군을 동맹으로 삼아 군량과 군선을 확보하고, 시코쿠의 반 헤이케 세력과 연락을 취하는 등, 1개월에 걸쳐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요시쓰네가 육지에서,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바다에서 야시마를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던 것이며,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그만두라고 해도 듣지 않고 폭풍우 치는 바다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단노우라 전투 이전에도, 수군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데 1개월이 걸렸다. 또한, 요시쓰네가 수병과 노잡이를 활로 겨냥하면, 헤이케 측도 반격할 것이다. 당시 헤이케 측은 내륙의 거점을 잃고, 궁시의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초반에 화살을 다 써 버리고, 나중에는 쏘이는 대로 무방비한 수병과 노잡이가 희생되었다. 애초에 당시 전투에는 규칙이 없었고(엄밀히 말하면 무사가 사적인 이유, 영지 문제나 명예에 관한 문제로 자력・당사자 간에 해결하려고 전투에 이르는 경우에는 일기토치나 전투를 하는 장소의 지정 등이 있었던 것이 『이마요키 모노가타리슈』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시쓰네의 승인을 당시로서는 비겁한 전법에 있다고 비난하는 것에 대한 반론도 있다.
:요시쓰네는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평씨 추토라는 군무를 수행하면서, 조정과의 좋은 관계를 구축한다는 상반되는 임무를 수행하고, 군사・정치 양면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무단 임관 문제는 『아즈마카가미』의 창작'''이며, 「정치 감각의 결여」라는 평가는 옳지 않다.
또한, 히시누마는 다른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55]
- 요리토모 대관으로서의 요시쓰네*
:먼저, 요리토모가 요시쓰네에게 상락을 명령했을 단계에서는, 어디까지나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공물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규요』주에이 2년 11월 7일조에도, 요리토모 대관(요시쓰네)이 오미에 도착했을 때 병력은 5, 600기밖에 없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적혀 있다. 또한, 같은 10일조에는 요시카가 요시쓰네의 입락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요리토모가 요시쓰네를 파견한 당초의 목적은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받고 도카이도・도잔도 지역의 치안 회복에 임하는 동시에 조정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며, 요시카와의 군사적 대결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호주지 전투에 의해 요리토모는 요시카와의 대결을 결의하고 노리요리가 이끄는 요시카 토벌군을 별도로 파견하고, 선행하고 있던 요시쓰네에게 합류를 명령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위에서, 요리토모로부터 조정과의 정치 교섭의 권한을 인정받은 것은 요시쓰네뿐이었다. 대 요시카 전, 계속되는 대 평씨 전에서 주요 장수였던 것은 노리요리였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에 대한 승전 보고는 요시쓰네가 하고, 그 후에도 재경 대관으로서 요시카에 바뀌어 교토의 치안 유지를 맡은 것도 요시쓰네였다(당시 조정의 가장 큰 관심은 교토의 치안 문제였다). 요리토모는 조정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대 요시카・평씨 전에 대한 군사 작전과 동국 지배의 확립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한 「사무적 대관」으로서 요시쓰네를, 실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장수의 역할을 하는 「군사적 대관」으로서 노리요리를 두는 것으로 자신의 방침을 추진하려고 했다고 본다.
元木泰雄는 기존에는 대체로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대해 최근 현저하게 발전된 사료 비판과 『규요(玉葉) 등 동시대 사료를 꼼꼼히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요시쓰네(義経)상을 제시하고 있다.
- 요리토모(頼朝)와의 관계・부자의 의(父子之義)*
거병 당시 요리토모는 자신의 영지나 충실한 무사단이 없었고, 독립심이 강한 관동 무사들이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옹립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적은 수의 郎黨(로우토우)만을 거느렸을 뿐이었지만, 자신의 오른팔이 될 수 있는 동생 요시쓰네의 도래는 큰 기쁨이었다. 이후 요시쓰네는 "어소지(御曹司)"라고 불리지만, 이는 『규요』에 양자는 "'''부자의 의(父子之義)'''"라고 있는 것처럼 요리토모의 양자로서 그의 보호하에 들어왔음을 의미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계승자이기도 한 존재가 되었다(당시 요리토모의 적장자 요리이에(頼家)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아버지" 요리토모에게 종속되는 입장에 놓였다고 생각된다.
-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교토 수호*
요시쓰네에게 기요시(義仲) 토벌 출진이 돌아온 것은 관동 무사들이 영지 확장과 관계없는 출정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요시쓰네와 하나라이(範頼)는 모두 소수의 군세를 이끌고 가마쿠라(鎌倉)를 출발하여, 도중에 현지 무사들을 조직함으로써 기요시와의 대결을 도모했다. 특히 입경에 있어서는 호주사 합전(法住寺合戦)에서 기요시와 적대했던 교토 무사(京武者)들의 역할이 컸다. 이치노타니 전투(一ノ谷の戦い)도, 하나라이와 요시쓰네에게 일원적으로 통솔된 형태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각지의 源氏(겐지) 일문과 교토 무사들과의 혼성군이라는 색채가 강했다.
합전 후 요시쓰네는 피폐해진 도읍의 치안 회복에 힘썼다. 대신 평씨(平氏) 토벌을 위해 관동 무사들과 원정한 하나라이는 장기전을 선택한 것과 함께 진격이 정체되고, 사기 저하도 눈에 띄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요리토모는 단기 결전도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요시쓰네를 기용했고, 요시쓰네는 훌륭하게 이에 응하여, 사이고쿠(西国) 무사를 조직하고, 야시마(屋島)・다나우라(壇ノ浦) 전투에서 평씨를 멸망시켰다. 이것은 종군해 온 관동 무사들에게 있어서, 전공을 세울 기회를 빼앗긴 것을 의미하며, 요시쓰네에 대한 분노를 확대하는 부산물을 낳아 요리토모를 당황하게 했다.
- 결렬과 전락・전설의 시작*
요리토모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요시쓰네에게 '''이요노카미(伊予守) 추거'''라는 최고의 영예를 주는 대신 가마쿠라로 소환하여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형태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속셈은 빗나갔다. 요시쓰네는 평씨 멸망 직후 법황(法皇)으로부터 원(院)의 친위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묘시(院御厩司)에 보임되었고, 검비위사(検非違使)・좌병위(左兵衛尉)를 이요노카미와 겸임하며 계속 교토에 머물렀다. 고시라카와(後白河)는 독자적인 군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요시쓰네를 활용한 것이다. 치텐노킨(治天の君)의 권위를 배경으로 "아버지"에게 거역한 요시쓰네. 양자의 관계는 여기서 결정적인 파탄을 맞는다.
요시쓰네는 요리토모 토벌의 원선(院宣)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응하는 무사단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급속히 몰락했다. 이미 요리토모는 각지의 무사들에게 은상을 주는 등 과단성 있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입경 이후 요시쓰네를 협력해 온 교토 무사들도 은상을 줄 수 없는 요시쓰네에게는 따르지 않았다. 도읍의 부흥에 힘쓰고 "'''의사(義士)'''"라고 칭송받았던 요시쓰네가 이러한 형태로 극적으로 몰락한 것이 교토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전설화의 한 걸음이 되었다.
요시쓰네 등이 물러난 뒤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입경하여 조정에 개입한 것은, 과거의 동생들이 아니라 요리토모의 장인인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였다. 아직 어린 요리이에의 외조부이며, 적장자 요시토키(義時)가 전공을 요시쓰네에게 빼앗기는 등 도키마사는 요시쓰네에게 강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몰락에 따라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의 계승자의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확정하고, 세력 확대의 시초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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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Minamoto Yoshitsune – Japanese war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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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真岡市史案内第4号中村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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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源義経周辺系図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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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hitsune: A Fifteenth-Century Japanese Chronicle
Stan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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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義経肖像としてよく用いられるこの巻物は弁慶の画と対になっており、『義経記』の藤原泰衡に襲撃される場面を描いたものである(容姿については#容貌・体格を参照)。
[12]
문서
『系図纂要』では誕生日を2月2日としている。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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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際寺の位牌より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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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妻鏡』文治2年閏7月29日条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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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妻鏡』文治3年2月10日条
[16]
문서
『清和源氏系図』続群書類従 第五輯 系図部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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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妻鏡』文治2年6月28日条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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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官とは四等官制において第三位目の職を指す言葉であり、義経が任じられた左衛門少尉が衛門府の、検非違使少尉が検非違使の第三位の職にあたるためこう呼ばれる。通常は「はんがん」だが、『義経』の伝説や歌舞伎などでは「ほうがん」と読む。
[19]
웹사이트
文楽編・義経千本桜|文化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https://www2.ntj.jac[...]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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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経の少年期を記した「牛若奥州下りの事」の部分は金刀比羅宮本にはなく、学習院本、京師本による。
[21]
문서
この時の常盤の逃亡やその後の話は『平治物語』や『義経記』などの軍記物に詳しいが、軍記物の性格上どこまでが事実を語っているかの判定が難しい。
[22]
문서
『尊卑分脈』
[23]
문서
軍記物や伝説によると11歳(15歳説も)の時、自分の出生を知ると、僧になることを拒否して鞍馬山を駆け回り、武芸に励んだ鞍馬山で天狗の面を被った落人(=鞍馬天狗)から剣術の手解きを受けたとされている。
[24]
웹사이트
滋賀県竜王町「義経元服のいわれ」
http://www.town.ryuo[...]
[25]
문서
藤原秀衡の庇護を得たことについて、伝承によれば遮那王16歳の時に、金売吉次という金商人の手配によったというが、この人物は当時多くいた奥州と都を行き来する商人達を元にした虚構の人物と思われる。
[26]
문서
『吾妻鏡』では「弱冠一人」で宿所を訪れたとあり、『源平盛衰記』では20騎、『平治物語』では100騎を率いていたとする。
[27]
문서
『玉葉』7月30日条
[28]
문서
『玉葉』11月2日条
[29]
문서
『玉葉』11月7日条
[30]
문서
『玉葉』12月1日条
[31]
문서
『平家物語』『源平盛衰記』による。『吾妻鏡』寿永3年2月7日条でも、義経が精兵70騎を率いて鵯越から攻撃したとあり、義経はこの合戦で大きな働きをしたとされている。ただし近年、この「戦い」において義経が果たした役割や、「逆落とし」が実際にあったか等については、様々な異論も提示されている。詳細は一ノ谷の戦い参照。
[32]
학술지
元暦西海合戦試論-「範頼苦戦と義経出陣」論の再検討-
立命館大学人文学会
[33]
서적
源義経
人物往来社
[34]
문서
「判官どのは君(頼朝)の代官として、その威光によって遣わされた御家人を従え、大勢の力によって合戦に勝利したのにもかかわらず、自分一人の手柄であるかのように考えている。平家を討伐した後は常日頃の様子を超えて猛々しく、従っている兵達はどんな憂き目にあうかと薄氷を踏む思いであり、皆真実に和順する気持ちはありません。自分は君の厳命を承っているものですから、判官殿の非違を見るごとに関東の御気色に違うのではないかと諫めようとすると、かえって仇となり、ややもすれば刑を受けるほどであります。幸い合戦も勝利したことなので早く関東へ帰りたいと思います」
[35]
학술지
後鳥羽天皇在位から院政期における神器政策と神器観
[36]
서적
武力による政治の誕生
[37]
서적
頼朝の時代 一一八〇年代の内乱史
平凡社
[38]
학술지
源義経の挙兵と土佐房襲撃事件
[39]
문서
宣旨作成者一覧
[40]
문서
기타 인물 목록
[41]
서적
玉葉 5월 10일 조
[42]
서적
玉葉 11월 24일 조
[43]
문서
義経討伐과 관련된 사신에 대한 논의
2022-06-00
[44]
문서
藤原通衡에 대한 논의
2022-06-00
[45]
문서
의경의 관례에 대한 전승과 자료
[46]
서적
義経の登場
日本放送出版協会
[47]
학술지
常盤―源義経の母―
京都橘大学
[48]
서적
平家物語図典
小学館
[49]
문서
屋島 전투에서의 모리쓰구의 발언
[50]
서적
真岡市史案内 第4号中村城
真岡市教育委員会
[51]
서적
伊達氏と中村八幡宮
中村八幡宮
[52]
서적
源義経周辺系図解説
批評社
[53]
서적
現今児童重宝記 : 開化実益
此村彦助
[54]
문서
金史別本에 대한 논의
[55]
학술지
在京頼朝代官源義経
[56]
웹사이트
判官物(ほうがんもの)とは
https://kotobank.jp/[...]
[57]
문서
도키와와의 도주와 그 이후 이야기에 대한 논의
[58]
문서
의경의 젊은 시절과 무예 수련에 대한 전설
[59]
문서
히데히라의 보호를 받게 된 과정에 대한 전승과 허구
[60]
문서
요시쓰네의 역할과 히요도리고에 전투에 대한 논의
[61]
문서
요시쓰네의 임관과 요리토모의 반응에 대한 기록과 해석
[62]
문서
요시쓰네의 서쪽 출진 중지 이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
[63]
문서
엔케이본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따른 요시쓰네의 가마쿠라 방문
[64]
문서
요시쓰네의 헤이케 추토 제외 이유에 대한 새로운 해석
[65]
문서
요시쓰네의 행동과 요리토모의 명령에 대한 비교 분석
[66]
문서
요시쓰네의 가마쿠라 방문과 고시고에장의 진위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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